Ⅵ. 21세기의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
21세기의 정치 패러다임은 새로운 내용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정치가 갈등과 대립의 정치였다면 21세기 정치는 화합과 조화의 정치가 되어야 한다. 국민을 평소에는 소외시키고 배제시켰다가 필요할 때만 동원했던 동원의 정치에서 참여의 정치로 바꾸어야 한다. 민주 정치의 성립 여부는 자치와 참여에 있다.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결정에 스스로 참여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정치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정치적 패러다임의 기본 틀은 권력이 분산되고 일반 국민의 자치와 광범한 직접 참여가 보장된 참여민주주의가 되어야 한다. 명령과 통제 대신 협력과 도움에 익숙하고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참여민주사회를 이루어나가기 위한 법과 제도의 개선, 정치문화의 변화가 올바른 정치개혁의 방향이다.
1. 정치과정의 민주화
새로운 정치의 패러다임에서는 우선 의회, 선거, 정당 등 정치과정의 실질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론적으로만 논의되고 법 조항으로만 보장되던 형식적인 시민권과 참정권이 실질적으로 행사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지금까지 정책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반대자나 정치적 소수자의 참여도 보장되어야 한다.
특히 지배층은 특권을 독점하면서도 피지배층을 이루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의 책임을 포기하였다. 따라서 국가 행위의 한계를 밝혀 자의적인 국가권력으로부터 개인 또는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 및 부의 공정한 분배의 상호 결합에 의해서 나타난 최선의 정치 형태라고 평가받고 있다.
실질적으로 민주주의가 운용되는 원리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사이의 부적절한 균형이라든가 대의제 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들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비민주성이 드러난다. 게다가 돈으로 얼룩진 낡은 정치 관행과 선거 풍토, 거기에 익숙해진 부패한 정치인들의 행태가 우리 정치의 수준을 낙제점 이하로 떨어뜨렸다.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은 어떤 틀을 갖춰야 할 것인가? 기존의 정치 체제가 안고 있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국민의 요구를 제대로 빠르게 파악하여 정치 과정에 반영하지 못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의회의 활성화가 매우 중요하다. 현대 복지국가에서는 행정권의 권한이 너무 커져서 실질적으로 행정 국가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따라서 이 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시민 입법권을 보장해 주거나 국민투표, 국민소환제도나 국민발안 제도 등을 도입하는 것이 필요하다. '탄환 대신 투표로(Not Bullet, But Ballot)'-국민 정치참여의 중앙통로인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선거는 주권자인 국민의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형성을 보장하고, 국민 의사를 바탕으로 통치권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선거의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참여의 원리와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참여의 기회나 가능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공허한 말 잔치에 그친다.
선거에서의 투표는 물론 정권교체가 가능한 공정한 선거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선거공영제를 실시하여야 한다.
불법 타락선거의 여지를 없애고 정책대결의 선거 기반을 마련해 나가는 최선의 방법은 선거공영제이다. 또 대의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검토해볼 수 있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다원화된 사회에서 계층과 직능대표성을 높이고 지역구 활동이 어려운 전문가나 소수 정파의 대표나 신진 세력이 쉽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취지를 갖고 있다. 또 사회적 소수자의 정치적 권리 보장도 필요하다. 신체에 중대한 장애가 있어 투표권의 행사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정당체제도 바뀌어야 한다. 최근에는 시민단체들을 통한 길도 있지만, 국민이 국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정당을 통한 정치활동이었다. 정당을 통하지 않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고, 국가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다. 시민사회단체의 역할이 커진 지금도 정당은 여전히 국민을 정치적으로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이념적 성향이나 지지기반이 서로 다른 정당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정책경쟁을 통해서 정권을 담당할 수 있는 기회균등히 보장되는 복수정당제도가 필요하다. 소수의 보호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복수정당제도는 사실상의 일당독재를 위장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자 보호를 기본적 이념으로 하지 않고 선거를 중심으로 한 정당들은 많은 한계가 있다. 정당에 대한 국민의 통제가 이루어져야 하며, 정당구조는 지방자치가 활성화되면 바뀌게 될 것이다.
또 지방자치의 활성화도 필요하다. 국민이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공동체적인 삶을 꾸러 나가는 것은 민주주의 발달에 커다란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방단위에 권력을 넘겨주어 중앙집권의 통치구조를 지방분권 체제로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지방자치단체의 기본적인 권한과 기능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지방자치가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다. 따라서 중앙정부의 권한과 재정의 상당 부분을 지방정부로 돌려주어야 한다.
2. 기본권의 보장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참여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이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인간의 자격으로 누리는 '시민적 권리', 국가 구성원으로서 누리는 '정치적 권리', 생활을 하는 경제적 인간으로서 누리는 '경제적 권리' 등의 보장이 대단히 중요하다.
또 언론은 대중 조작과 대중의 탈정치화의 주역이 아니라 공정한 여론을 전달하는 매체가 되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외적 조건은 경제적 평등의 달성이다.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 아래서는 국민의 뜻에 따라 정권이 평화적으로 바뀔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존 정부를 비판하거나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국민의 힘은 사경 제력(私經濟力)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빈부의 격차가 심한 곳에서는 사경 제력을 독점한 사회적 지배층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게 되고 사경 제력이 빈약한 일반 국민은 기존 정부를 견제할 힘을 갖지 못한다. 또 이 같은 빈부의 격차는 계층 간의 이해 대립을 첨예화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성립요건인 동의의 기반을 침식한다. 사회와 경제의 토대가 미처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은 자칫 '발육부진의 민주주의(creeping democracy)'가 되기 쉽다.
3. 신진 정치 세력의 등장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만들고 유지해 나가는 과정에서 기득권 정치구조에 편입되지 않은 신진 세력이 중요한 구실을 맡아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수혈론을 제기했을 때 야당이 강하게 비판했지만 국민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여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른바 '고승덕 파문'에서 드러난 것처럼 젊다는 것만으로, 또는 참신하다는 것만으로 신진세력이며 바람직한 개혁 추진세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신진세력과 기성세력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은 나이나 정치경력이 아니라 도덕성과 개혁성, 그리고 민주화 과정에서의 헌신 등이 되어야 한다. 물론 자질과 능력은 기본이다. 21세기를 끌어갈 새로운 정치세력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시민적 토대를 바탕으로 한 열린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둘째, 인물 중심의 무원칙한 연줄 정당이 아니라 이념과 노선, 정책의 동질성에 기초한 정책정당을 지향해야 한다. 당원의 당비에 의한 정당 재정의 자립적 토대를 구축하고, 당내 민주주의를 활성화하며, 시민사회에 대하여 개방적인 정당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또 중앙당과 지구당의 관계를 수평적인 관계로 만들고, 정치자금을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망국적 지역대결구도도 뛰어넘어야 한다.
Ⅶ. 맺음말
대통령과 정부가 경제구조개혁에 다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개혁은 구조조정이란 뜻으로 상식화돼 있고, 구조조정은 기구와 인원의 감축이란 정책으로 일반화돼 있다.
구조적으로 하부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금융기관과 기업에 구조조정을 지시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상층구조부터 살을 깎는 아픔을 스스로 시작해야 한다. 정치개혁 또한 마찬가지다. 정치개혁의 첫 번째 대상은 청와대다. 대통령이 먼저 권위주의의 틀을 깨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 둘째가 정치권이다. 지난 4·13 총선을 앞두고 정치개혁을 시도했지만 선거가 임박해서 착수한 개혁은 용두사미 격이 돼 의석 수를 몇 자리 줄이는데 그치고 말았다. 선거공약으로 정치개혁을 내걸었으나 추진세력의 힘은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법과 제도의 개선만으로 정치의 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날 정치가 타락하고 선거가 타락한 것은 법과 제도가 미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치관계법의 개정은 정치발전을 위한 필요조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정치 행태를 반성하는 정치권의 뼈저린 반성이다.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는 안중에도 없고 군사작전 펼치듯이 완승만을 추구하는 상황에서는 무리한 법 적용이 따르고 탈법과 불법이 판치기 마련이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정치관계법은 각 정당의 당리당략이 아니라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따라 나라와 겨레의 진정한 발전을 위하는 방향으로 다시 고쳐져야 한다.
국민의 지지를 돈으로 사려하고, 당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또 정경유착의 관행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정치자금법이 아무리 엄격해도 깨끗한 정치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이를 위해 먼저 지난 대선 자금이 모두 밝혀져야 한다.
그동안 정치권에서는 선거자금의 정확한 규모를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한보비리가 터지면서 대선 자금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것은 정권의 존립에 하나의 원죄처럼 작용하는 요인이다. 여·야는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대선 자금을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으나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대통령 선거가 워낙 방대하게 치러지기 때문에 정확한 자금을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중앙당 차원에서 사용된 금액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사조직에서 쓰인 비용도 일부는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대선 자금을 가능한 한도 안에서 밝히는 것만이 정권의 정치적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길이다. 또 정치자금의 출처는 대부분 기업이다. 기업들은 "달라니까 주었다. 줄 수밖에 없다."라고 무척 억울해하는 표정이지만 정치인들은 "주니까 받았다."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지난날 정치자금을 기부하는 대가로 기업들이 특혜를 받았던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기업도 지금까지의 정치자금의 기부 내역과 그로 인한 반대급부를 솔직하게 고백함으로써 정치자금을 정치권에 바쳐야 하는 관행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와 여당은 심기일전해 침체된 정국을 탈출하는 기회를 정치개혁에서 찾아야 한다. 청와대와 정치권이 스스로 구조조정에 앞장서면 행정부도 뒤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부 관리들이 무사안일한 사고로 나라를 구하는 일에 앞장서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이 다시 개혁을 시작하겠다는 결심이 구체적으로 청와대와 정치권에서 현실화하면 행정부도 발 벗고 나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다. 구조조정의 형식만 갖추었을 뿐 준 정부기구로 둔갑되는 양태로 나타나는 등 1차 구조조정이 실패했던 점을 철저히 점검하고 과감하게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철저히 단행될 때 금융기관과 공기업의 구조조정이 비통한 아픔 속에서도 이뤄질 수 있다.
그래야 부실기업도 적극적으로 정리하는 계기가 된다.
정치개혁도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 정치권의 합의가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설 때 여기저기 버티고 있는 구조적인 난관도 돌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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